맨해튼을 차지하라 – 뉴암스테르담 개척자들의 땅과 꿈

Jessy Kim
방문: 68

맨해튼의 땅값은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17세기 초 이 섬은 신대륙에 막 뿌리내린 작은 식민지에 불과했다. 1626년, 네덜란드 식민지 관리 피터 미누이트는 인디언들로부터 맨해튼 섬을 단 60길더(현재 가치로 약 1000달러)와 교환하여 사들였다​. 이렇게 탄생한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은 초기에는 인구 수백 명 남짓한 교역 거점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안목을 지닌 개척자들과 가문들이 이 땅의 가치를 알아보고 선점해나가면서, 맨해튼 부동산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뉴암스테르담 개척: 교역소에서 도시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는 모피 무역을 발판으로 뉴암스테르담을 세웠다. 맨해튼 남단에 작은 요새와 마을이 형성되었고, 주변으로 몇몇 농장이 자리 잡았다. 식민지 초기부터 뉴암스테르담 사회는 다민족·다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체 인구의 약 절반만 네덜란드인이었고 나머지는 프랑스인, 독일인, 스칸디나비아인, 브라질 출신 유대인 등 다양했다​. 새로운 정착민들은 신앙의 자유, 자치 권한, 그리고 10년간 세금을 면제받는 무상 토지 제공 등의 파격적인 조건에 이끌려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뉴암스테르담은 활기에 넘치는 개척 사회로 성장했지만, 그 규모는 여전히 작았다. 1660년대 초 식민지 인구는 고작 1,500명 가량에 불과했고​, 마을을 벗어나면 섬 대부분이 농장과 목초지, 그리고 ‘할렘’(Nieuw Haarlem) 같은 작은 부락들이 전부인 소박한 풍경이었다.

이러한 소규모 공동체에서도 토지는 곧 부(富)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초기에 네덜란드 당국은 정착을 장려하기 위해 대토지 무상 분양, 이른바 파트룬(patroon) 제도를 도입하여 부유한 투자자에게 넓은 영지를 하사하기도 했다​. 일반 정착민들도 시간이 지나며 토지를 개인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는데, 1650년대에 이르러 회사는 식민지 경영의 난항을 타개하고자 정착민들에게 보다 많은 토지를 자유 보유지 형태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뉴암스테르담의 마지막 총독 피터 스튀베선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거대한 농장을 확보했다. 그는 1651년 서인도회사 이사들을 설득해 맨해튼 동쪽 5가에서 17가에 이르는 광대한 땅, 이른바 “그레이트 바우어리(Farm No.1)”를 자신의 사유 농지로 얻었다​. 이러한 초기의 부동산 시스템하에서 토지를 선점한 이들은 훗날 막대한 부를 일궜고, 그중 몇몇은 뉴욕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다.

반더돈크: 평화가 가져다 준 영지

뉴암스테르담 개척기의 대표적 토지 거부(巨富)로 아드리안 반더돈크(Adriaen van der Donck)를 빼놓을 수 없다. 네덜란드에서 법학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던 반더돈크는 1640년대 뉴네덜란드로 이주해 식민지 행정과 원주민 관계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키프트 전쟁으로 불리는 1641~1645년 인디언과의 분쟁에서 그는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반더돈크는 무력 충돌을 끝내기 위해 네이티브 아메리칸과 평화 조약 체결을 주도했고, 이 공로로 막대한 토지 보상을 받았다​. 네덜란드 당국은 그에게 현재 뉴욕 욘커스(Yonkers) 일대에 해당하는 넓은 토지를 하사했고, 반더돈크는 추가로 인근 토지까지 매입하여 자신의 영지 콜렌돈크(Colen Donck)를 구축했다​. 그는 이 토지의 지주로서 현지에서 “영주(jonkheer)”란 존칭을 얻었는데, 네덜란드어로 “욘커(jonker)”라고 불리던 이 칭호가 훗날 그가 거주하던 지역 이름인 욘커스(Yonkers)의 유래가 되었다​.

반더돈크는 풍부한 지식과 협상력으로 식민지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식민지 자문기구 9인회의 일원으로도 선출되어 뉴암스테르담의 자치 확대를 요구하는 등 개혁가 면모를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젊은 나이인 30대 중반의 나이에 인디언 습격으로 요절하고 만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반더돈크는 뉴암스테르담의 초기 부동산 부호 1세대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가 개척한 욘커스 지역은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지배기를 거쳐 발전을 거듭했고, 오늘날 뉴욕시 북부 외곽의 도시 욘커스로 이어져 그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올로프 반 코틀러: 양조장이 부동산 거물이 되다

다음 주인공은 올로프 스테븐센 반 코틀러(Oloff Stevensz van Cortlandt)로, 뉴암스테르담 개척사에서 자수성가한 부동산 재벌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1638년 평범한 회사 지원군 신분으로 뉴암스테르담 땅을 밟은 반 코틀러는 곧 재능을 발휘하여 서인도회사 관리로 두각을 나타냈다​. 1640년대에 식민지 창고 관리자와 세관원 등을 지낸 그는 1648년에 식민지 자유시민(Freeman) 지위를 얻어 독립적인 상업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맥주 양조업에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맨해튼 최초의 브루어리 중 하나를 운영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가 빚어낸 맥주는 당시 뉴암스테르담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교역품으로도 가치가 있어 돈을 불러들였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반 코틀러는 양조업으로 번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다. 그는 뉴암스테르담과 주변 지역에 광범위한 토지를 확보하여 놓았는데, 맨해튼 섬뿐 아니라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농장과 땅들이 그의 소유로 편입되었다​. 당시 뉴네덜란드 최대 부호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던 그는 맨해튼 북쪽과 허드슨강 연안의 땅을 대거 사들여 훗날 거대한 코틀러 가문 영지의 초석을 놓았다​. 예를 들어, 그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소유한 반 코틀런트 장원(Van Cortlandt Manor)은 오늘날 브롱크스의 반 코틀런트 공원(Van Cortlandt Park) 일대로, 뉴욕시에서 세 번째로 큰 공원이 된 곳이다​. 이 공원의 이름이 보여주듯 반 코틀러 가문은 네덜란드 통치기와 그 이후 영국 식민지 시대를 통틀어 뉴욕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지주 가문으로 남았다.

올로프 반 코틀러의 성공 비결은 단연 경제 감각이었다. 맥주 양조로 돈을 벌고, 그 자본을 다시 토지 매입에 재투자하는 선순환을 만든 그는, 뉴암스테르담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기업가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작은 식민지 마을의 병사 출신이었지만, 도시 행정 참여(그는 1650년대 뉴암스테르담 행정자문기구인 8인회와 12인회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와 인맥 형성을 통해 입지를 다졌다. 전략적으로 유력 가문과 혼맥을 맺고 식민지 정책 결정에도 목소리를 내며, 얻을 것은 놓치지 않는 현실감각을 발휘했다. 결국 그는 막대한 부동산 자산을 후대에 남겼고, 반 코틀러 가문은 뉴욕 부동산사의 초창기를 수놓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식민지 시대 부동산 시스템과 사회의 단면

뉴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뉴네덜란드 식민지의 부동산 시스템은 유럽의 봉건 전통과 신대륙의 현실이 뒤섞인 독특한 구조였다. 네덜란드 당국은 처음에는 부유한 투자자에게 거대한 땅을 주는 대신 이민자를 데려오게 하는 패트룬 제도를 시행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식민지 개발이 더뎠다​. 이에 따라 일반 이주민들에게도 일정 조건 하에 토지를 사유지로 취득할 수 있게 장려했는데, 토지 무상 불하기간 한정 면세 같은 인센티브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일부 정착민들은 개인 농장을 일굴 수 있었고, 능력 있는 이들은 상당한 토지를 모아 지주층으로 성장했다.

또한 뉴암스테르담 사회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노예 제도가 존재했지만, 네덜란드 당국은 때로는 실용적인 이유로 흑인 노예들에게 부분적 자유와 토지를 부여하기도 했다. 1644년 윌렘 키프트 총독은 11명의 아프리카 출신 노예에게 자유 신분(절반의 자유였지만)을 주고, 마을 북쪽 방어선에 해당하는 지역의 농지를 할당했다​. 이들은 네덜란드 식민지를 방어하는 완충 지대로 활용되었고, 그 대가로 땅을 경작하며 일정 조세를 바치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해방 흑인들의 부락은 훗날 “블랙 랜드(Land of the Blacks)”라 불렸는데, 1660년대까지 총 28명의 자유 흑인 남녀가 약 130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는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이 토지는 오늘날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와 워싱턴 스퀘어 공원 인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뉴암스테르담 초기 사회의 다양성토지 제도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한편, 1664년 뉴암스테르담이 영국에 함락되어 뉴욕(New York)으로 바뀌면서 부동산 제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영국 당국은 기존 네덜란드 주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대부분 인정하여 평화적인 통치를 꾀했다​. 네덜란드 지주들과 신임 영국 총독 리처드 니컬스 사이에 체결된 양도 조약에는, 항복 시 정착민들이 “각자가 노력으로 얻은 재산을 평온히 향유”할 권리가 보장된다는 관대한 조건이 포함되었다​. 덕분에 반더돈크나 반 코틀러 가문처럼 이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영국 치하에서도 그 재산을 지킬 수 있었고, 더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이후 18세기 동안 뉴욕에서는 옛 네덜란드 명문과 새로 부상한 영국계 부호들이 어우러져 대지주층을 형성했고, 맨해튼의 땅은 점차 한정된 이들의 손에서 거래되며 가치가 상승해갔다.

애스터 가문: 부동산 황금기의 서막

식민지 시대가 저물고 미국 독립 이후까지, 뉴욕 부동산으로 가장 큰 부를 일군 가문으로 애스터 가문(Astor family)을 들 수 있다. 가문의 시조인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는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독일 출신 이민자였지만, 그 성공 스토리는 뉴암스테르담 시대 선구자들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는 1784년 미국에 와서 모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벌었고, 19세기 초부터 뉴욕 맨해튼 부동산에 그 이익을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다​. 존 애스터는 맨해튼의 미래 가치를 내다보고 땅을 사들이는 데 과감했다. 1803년에는 맨해튼 중부의 농장 70에이커를 통째로 매입하여 헬게이트(Hellgate) 근처에 자신의 저택을 지었는데, 이 부지는 당시 시가지 북단인 42번가 일대에 해당했다​. 그는 이듬해에도 스캔들로 몰락한 정치인 아론 버로부터 맨해튼 땅을 헐값에 사들이는 등 공격적으로 투자를 늘려갔다​.

애스터가 특별했던 점은, 도시 발전 방향을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1830년대에 그는 뉴욕시가 머지않아 맨해튼 전역으로 팽창하리란 통찰을 갖고 모피상 등을 정리한 자금으로 맨해튼 곳곳의 토지를 사모았다​. 당시만 해도 황무지나 교외에 불과했던 땅들이었지만, 애스터는 도시가 북쪽으로 커질 것을 확신했다. 그는 사들인 땅에 직접 건물을 올리기보다는 장기 임대를 주어 꾸준히 지대를 받는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묵혀둔 토지의 가치는 뉴욕 인구 증가와 함께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애스터는 앉은 자리에서 부를 불리는 “땅 부자”의 전형이 되었다.

존 제이콥 애스터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로 불릴 만큼 거부가 되었으며, 1848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재산은 미국 GDP의 0.9%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2,760억 달러(한화 300조 원 이상)에 이르는 천문학적 금액이다. 한 상원의원이 당시 “미국의 1달러 중 1센트는 결국 애스터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고 평했을 정도다​. 애스터 가문은 이렇게 축적한 부로 뉴욕 곳곳에 투자하여 호텔 사업(맨해튼의 랜드마크였던 월도프-애스토리아 호텔 건설 등)과 각종 부동산 개발을 이어갔고, 한 세기가 넘도록 뉴욕 사회의 최상류층으로 군림했다. 존 애스터의 증손자 세대까지 부를 누리며 뉴욕의 거리와 지명 곳곳에 애스터의 이름이 새겨졌다(예: 맨해튼의 애스터 플레이스 Astor Place, 퀸즈의 애스토리아 Astoria 등). 뉴암스테르담 시절부터 시작된 맨해튼 부동산 신화가 애스터를 통해 절정에 달한 셈이다.

맺음말: 초창기 개척자들이 남긴 유산

불과 몇 백 년 전,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던 섬 맨해튼을 선구적으로 눈여겨보고 과감히 투자했던 개척자들은 뉴욕을 세계 부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뉴암스테르담의 초기 거주민들이 마련한 토지 시스템사회적 기반은 영국 식민지를 거쳐 미국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뼈대처럼 유지되었다. 특히 부동산을 통한 부의 축적이라는 개념은 반더돈크, 반 코틀러 같은 17세기 개척자에서 애스터 가문 같은 19세기 거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관찰된다. 이들이 남긴 족적은 현대 뉴욕의 부동산 시장에도 이어져, 오늘날에도 뉴욕에는 부동산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쥔 개인과 기업이 즐비하다. 맨해튼 곳곳의 지명 속에 남은 반더돈크, 반 코틀러, 애스터 등의 이름은 초창기부터 땅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의 선견지명을 대변한다. 뉴암스테르담 시기의 개척과 정착 이야기, 그리고 당대 주요 인물들의 부동산 모험담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닌, 오늘날에도 흥미있게 회고할만한 주제이다.


Related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