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콘 차트의 시작 - 1968년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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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인기 음악 순위, 오리콘 차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67년, 우유회사 홍보 임원 출신이었던 고이케 소코(小池聰行)는 “무엇이 히트곡을 만드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작은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음악 판매 데이터를 조사하고 주간 히트 순위를 내는 잡지 오리지널 콘피던스(Original Confidence), 줄여서 오리콘을 만들었다​. 1967년 11월 시범적으로 싱글 레코드 판매 순위를 발표했고 당시 1위는 Jackey Yoshikawa and His Blue Comets 밴드의 〈기타구니노 후타리(北国の二人)〉였다​. 이 곡은 "비공식 첫 1위"로 기록되어있다.

(오리지널 음반도 괜찮지만 나이드셔서 연주한 영상도 좋다.)

1968년 1월 - 첫 공식 차트

시범 차트 이후, 1968년 1월 4일 공식 첫 주간 순위가 발표되었다​. 역사적인 첫 번째 1위 곡은 의외로 신곡이 아닌 2년 전 발표된 노래였다. 주인공은 1966년에 나온 "쿠로사와 아키라 ・ 로스 프리모스(黒沢明とロス・プリモス)"의 〈Love You Tokyo〉였다. 당시 로스 프리모스의 보컬이었던 "모리 쇼지(森聖二)"는 훗날 인터뷰에서 “데뷔곡이 오리콘 첫 1위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통 가요가 첫 1위를 차지했지만, 1968년의 차트는 이후 여러 세대와 장르가 뒤엉키는 경쟁의 무대였다.

(Love You Tokyo 이외에도 두곡을 더 부르습니다.

영상 중간에 치직거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아래 링크는 다큐느낌의 동영상인데, 임베드 플레이가 되지 않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h1QYAy7lhGQ

그룹 사운드와 젊은 음악

1960년대 후반 일본에는 이른바 “그룹 사운즈(GS)”라 불리는 젊은 밴드 음악 열풍이 뜨거웠다. 비틀즈에 영향받은 밴드들이 일본식 록과 팝을 선보이며,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대표주자인 더 타이거스(The Tigers)는 1967년 말부터 폭발적 인기를 누렸는데, 이들의 두 번째 싱글 〈Seaside Bound〉는 일본 최초의 본격 록 히트곡으로 불리며 4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도쿄에 상경한 지 반년도 안 되어 순식간에 수백 명의 열성 여자 팬들이 몰려드는 등, 이전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아이돌 밴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그룹 사운즈 붐은 자연스럽게 오리콘 차트에도 반영되었다. 1968년 오리콘 주간 1위 기록을 보면, 곳곳에 밴드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4월에는 더 타이거스의 〈꽃목걸이/은하의 로맨스(花の首飾り/銀河のロマンス)〉, 같은 해 7월에는 다른 밴드인 더 템터즈(The Tempters)의 〈에메랄드 전설(エメラルドの伝説)〉이 정상에 올랐다​. 젊은 밴드들은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 비트를 앞세워 차트를 흔들었고, 열성 팬들은 매주 발표되는 차트 순위를 손꼽아 기다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순위를 확인했다.

 

돌아온 술주정뱅이 - 포크 크루세이더스의 깜짝 히트

오리콘 차트 초창기에는 예측 불가능한 히트곡들도 탄생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포크 크루세이더스(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의 〈돌아온 술주정뱅이〉였다. 원래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이 포크 그룹은 1967년 해체를 앞두고 자축 겸 마지막 앨범을 자비로 소량 발매했는데, 여기에 실린 엉뚱한 노래 하나가 운명을 바꿨다​. 우스꽝스러운 가사와 빠르게 돌린 듯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노래한 〈돌아온 술주정뱅이〉가 교토와 고베 지역 라디오에서 입소문을 타더니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이다​. 결국 이 노래는 1968년 초 오리콘 차트 정상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단숨에 125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골든 디스크를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뜻밖의 히트에 놀란 포크 크루세이더스 멤버들은 해체 선언을 번복해야 할 지경이 됐다. 급기야 이 노래의 인기에 힘입어 나기사 오시마(大島渚) 감독이 연출한 동명 영화 《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우리말 제목: <돌아온 술주정뱅이>)가 제작되었고, 해체 직전이던 멤버들은 얼떨결에 자신들의 히트곡을 소재로 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취향이었습니다.)

 

신예 Pinky & Killers와 17주간의 차트 정복

1968년 하반기, 신예 보컬 그룹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오리콘 차트를 장기간 접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화제의 주인공은 여성 보컬 "콘 요코(혼다 요코, 애칭 ‘핑키’)"가 이끄는 혼성그룹 "핑키와 킬러스(Pinky & Killers)"였다. 그들의 데뷔곡 〈사랑의 계절(恋の季節)〉이 1968년 가을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며 무려 17주간이나 오리콘 1위를 지켰다​. 이 경이적인 기록은 당시 일본 가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온 나라가 이 멜로디를 흥얼거릴 정도였다.

〈사랑의 계절〉의 성공으로 핑키와 킬러스는 1968년 연말 제10회 일본 레코드 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거머쥐었고​, 그 해 NHK 홍백가합전 무대에도 초청되는 영예를 안았다​. 특히 홍백가합전 역사상 최초의 혼성 그룹 출연이라는 타이틀을 달성했는데, 이는 남녀로 구성된 그룹이 공영방송의 최고 연말 무대에 설 만큼 대중적 인기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방송 출연을 두고 NHK 내부에서 고심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결국 압도적인 인기 앞에서 출연이 성사되었다. 당시 핑키(콘 요코)는 “이렇게 빨리 스타가 될 줄 몰랐다”며 행복한 눈물을 보였고, 멤버들은 “차트 1위 덕분에 꿈같은 무대에 섰다”며 오리콘 차트에 고마움을 표했다.

서구 팝의 상륙과 다양한 음악의 공존

흥미로운 점은, 오리콘 차트가 일본 가수들만의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1968년 차트 상위에는 서양의 히트 팝송들도 얼굴을 비쳤다. 예를 들어, 1968년 4월 오리콘 정상에는 영국 밴드 비지스(Bee Gees)의 〈Massachusetts〉가 올랐다​. 또 9월에는 미국의 포크 듀오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명곡 〈The Sound of Silence〉가 1위를 차지하며 일본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반면 한국의 가요톱텐에는 외국곡이 올라온 적이 없었죠.)

차트가 음악계에 가져온 변화와 파장

오리콘 차트의 등장은 일본 음악 산업의 게임의 규칙을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가수의 인기나 노래의 성공은 방송 출연이나 유행가 느낌으로 막연히 판단되곤 했다. 하지만 숫자로 순위를 매기는 차트가 도입되자, 음악계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인된 성적표를 얻게 되었다. 가수와 소속사는 이제 “오리콘 O위”를 중요한 홍보 수단으로 내세웠고, 1위를 차지하면 명예를 얻는 것은 물론 판매량도 더욱 탄력을 받았다.

“오리콘 1위 가수”라는 타이틀은 엄청난 상징성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신인에게도, 오래 활동한 베테랑 가수에게도 1위는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예컨대 1968년에 17주 연속 1위를 경험한 핑키와 킬러스는 단숨에 전국구 스타가 되었고, 이후로도 많은 가수들이 오리콘 1위 달성을 꿈꾸게 된다​. 대중 역시 차트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고, “이번 주 1위곡”을 들어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산업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레코드 회사들은 발매 일정을 조율하여 경쟁이 덜한 시기에 싱글을 내기도 하고, TV 프로그램에서는 오리콘 순위를 소개하며 가수들을 불러모았다. 오리콘 차트는 이렇게 음악계의 공용 언어가 되어갔다. “오리콘 차트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말이 가수의 인기 지속을 뜻하게 되었고, 오리콘 지수는 곧 대중의 반응을 나타내는 지표로 신뢰받았다​.

에필로그

오리콘 차트는 이후 해를 거듭하며 점차 체계화되고 영향력을 키워나가, 현재까지도 일본의 대표 음악 차트로서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사족!

저도 오리콘을 소개하는 김에 순위를 매겨보겠습니다.

제가 뽑은 오늘의 1등은... 오리콘 비공식 최초 1위였던 "북쪽나라의 두사람" 입니다.

그리고, 2등은 에메랄드 전설(エメラルドの伝説).

3위는 Love You Tokyo! (듣고 있으면 현인의 1948년 작 "서울야곡"이 떠오릅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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